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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한양국은 옛날부터 긴밀한 관계를 가져왔고, 청나라초기 양국은 국경지역에 일년1회 또는 2회의 물물교환의 교역을 했었고 당시는 "북도개시제도"라고 불렀다.

1882년, 조선대신 이용숙은 양국의 민간인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청나라에 "북도개시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통상조약을 맺을 것을 건의했다. 1882년8월, 중국(당시 청나라)은 텐진(天津) 해관의 周馥(JIO FU) 및 馬建忠(MA JIAN ZHONG)을 파견하여 조선의 전권대사 조녕하와 중국천진(天津)에서 <중국조선민간상인 수륙무역조약 8조항>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체결한 후, 중국인들이 한국으로 이민해오기 시작했다. 화교가 정식으로 한국으로 이민한 것이 올해까지는 만 120년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최초로 한국에 장사하러온 사람은 중국의 오장경(吳長慶)장군을 따라 군수장사를 하는 상인들이었다. 다음은 33세의 공련덕(鞏連德)이었다. 이 사람은 먼저 당시의 60량 의 은화로 서울에서 첫 번째의 화교잡화점포를 시작했고, 그 뒤에 1,200여 량의 은화로 현재의 관수동일대에 13칸 반의 토지 및 건물을 사드렸다.

1883년9월에서 1884년4월말까지 중국인 이성신(李成信)등 13명이 서울에서 24,000량 은화로 가옥13칸 토지50여 칸을 사드리고, 1885년쯤에 화교들이 서울에서의 활동범위가 관수동 수표동에서 남대문일대에 확장했고, 당시 서울의 상업중심지역인 중로시장에도 화교들의 점포가 많이 생겼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한국으로 이주한 화교의 대부분이 중국 산동(山東省), 하북성(河北省), 江蘇省(JiangSu) 浙江省(ZheJian) 복건성(福建省) 광동성(廣東省)등에서 온것이며, 그 중에 산동(山東省)사람이 제일 많았다. 이들이 지참하는 자본규모 및 영업범위는 당사의 일본상인들의 경쟁상대 이었다.

당시의 일본의 조사보고에 따르면: [조선인에게는 청나라사람은 계속 상품의 공급자입장이었다. 조선인들이 수요하는 물품중의 상당수가 청나라상인들이 공급하고있다. 일본상인들은 단순 소량의 위탁판매에 불과했다.......], 경영한 상품들이 수건 양말 주류 밀가루 심지어 금속 철기 등에 이른다.

6.25전쟁이 터지자 화교들의 재산은 대부분 전쟁으로 상실되었다. 당시의 가치로 약 30억 원에 달했다. 그 뒤, 많은 화교들이 귀국 또는 외국으로 이주했고, 현재는 21,806명이 등록하고 있다. 아직도 대부분이 산동(山東省)사람이고 90%이상이 중화민국국적을 소유하고있고, 중화민국의 단일국적의 해외교민이다.

현재, 화교들이 경영한 사업은, 음식업소(중화요리 포함)이외에, 한의사,약사,잡화, 그리고 여행사, 토산품점포, 수출포장대행, 등이고, 한국정부의 외국인거주자에 대한 정책적 제한의 완화로 각종 업종에 종사하는 화교도 적지는 않다.